불교의 전래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식 기록일 뿐, 불교가 이 보다 먼저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양고승전(梁高僧傳)》(519) 등의 문헌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직접 들어오지 않고 중국[1]을 거쳐 들어왔으며 또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불교가 8~9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에서,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 불교와는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이다.
당시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전까지 한국의 민간에서 믿어 온 고유한 민간신앙인 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별다른 마찰 없이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초기 전래시 고구려와 백제 보다는 고유 신앙의 융합에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372~668)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고구려 전래
불교의 고구려(高句麗) 전래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인 374년에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혹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한국 사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고국양왕 8년(391)에 "불법을 믿고 받들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다음 해인 광개토왕 2년(392)에는 평양에 9사(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구법(求法)과 전교(傳敎)의 고승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
고구려 불교의 특징
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 fl. 500년 전후)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新三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2] 승랑의 사상은 승전(勝詮) · 법랑(法朗: 507~581[3]) · 길장(吉藏: 549~623)으로 이어졌으며, 길장에 의해 새 종파인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4]
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 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관(惠灌)은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을 널리 펴서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2]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로 가 승통(僧統)이 되어 신라 불교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
고구려 승려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초의 인물은 혜편(惠便: fl. 584)이었다. 그는 일본 비다츠(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그밖에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켰으며,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되었다.[5]
영양왕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간 혜자(惠慈)는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덕태자(聖德太子) 풍총(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혜자는 일본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는 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하여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는데, 후일 성덕태자가 불교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정치를 베풀 때 이러한 불교정신이 통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5]
같은 영양왕 때 일본으로 간 담징은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하였고 채색(彩色), 지묵(紙墨), 공예(工藝)에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류왕 8년(625)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의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5]
같은 왕대(王代)의 도등(道登)도 일찍이 당(唐)나라 길장 밑에서 삼론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강술(講述)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일본에 가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책자를 몇 권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승려들의 이름 이외에도 망각된 고승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고구려 불교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한 것이라고 믿어진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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